[사연을 담다] 카밀라 – 내가 아픈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카밀라

 

 

하나님의 뜻

저는 대학교 3학년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친척들을 만나러 아르헨티나에 갔는데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몸이 너무 아프기 시작하는 거예요. 몸이 너무 무거웠고, 자고 일어났는데도 너무 피곤했어요. 걸을 때 다리, 팔, 온 몸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것처럼 무거웠고, 방에 있으면 방이 빙빙 도는 것 같아 너무 어지러웠어요.사람들이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였고, 책을 읽을려고 하면 글자들이 사방으로 흔들렸어요.

병원에 가보니 의사가 귀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몸이 왜 자꾸 피곤한 건지, 왜 자꾸 불안함을 느끼는지 이유를 설명을 못하는 거에요. 그래서 의사들은 제 증상을 치료하지 못했고, 저는 계속 머리가 어지러운 채로 지내야했어요.

학교를 다시 다니기 시작했지만, 학교를 다닌 이틀 뒤에도 수업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어요. 강의자가 어지럽게 흔들려서 보였거든요. 제가 하는 모든 일마다 불안하고 초조해했어요. 그래서 부모님과 같이 지내려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집에서 돌아가고 나서도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걸으려고 할 때도 제 발 아래 도로가 트램폴린처럼 자꾸 튕기는 것 같아서 하루종일 의자에 앉아서 지냈고, 제 인생의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그저 책들을 읽었어요. 불교에 대한 책도 읽었고, 힌두교에 대한 책도 읽었고, 명상에 관한 것도 읽었어요. 그 어떤 종교이던지 제가 찾을 수 있는 새로운 시대 영적 종교들에 대한 것은 다 읽었어요. 하지만 그 어떤 것에서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성경공부와 교회에서 만나는 기독교인 친구들에게 제가 왜 이렇게 아픈지 모르겠다고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친구들이 “너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야. 너가 이렇게 아픈 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야.” 라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내가 아픈 게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지?’
어떤 한 기독교인 친구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넌 아마 평생동안 아플꺼야.” 라고 하는거에요.

친구들한테서 하나님에 대해 이런 말들을 들었을 때 하나님이 정말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어요. 하나님 왜 나를 아프게 만드셨는지, 그리고 왜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아프게 안 하시는지 정말 궁금해졌어요. 그러다보니 하니님과 점점 멀어지는 것이 같이 느껴졌어요.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제 유일한 희망이었어요.

 

책임분담

갑자기 엄마가 제가 하루종일 집에만 있는 것이 정말 보기 싫다고 하시면서 나가서 뭐라도 하길 바라셨어요. 그래서 엄마는 저를 엄마가 일하는 곳으로 데려가셨고, 저는 엄마 직장 옆에 있는 대학교에 가서 엄마가 하시는 연구에 참가할 지원자들을 찾기 위해 포스터를 붙였어요.

제가 그 학교에 있었을 때, 호주문화를 공부하는 어떤 사람이 저에게 다가와서 호주의 문화에 대해서 저한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와 대화하는게 너무 편했어요.

그리고 나서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저에게 종교가 있냐고 물어보더라구요. 몇일 전까지는 기독교인이었는데 기독교에 대해 어떤 희망도 없어서 불교인이 되려고 한다고 얘기를 했어요. 그녀는 자신도 기독교에 대해서 같은 생각이라고 말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며 공감하게 되었어요.

그녀가 정명석 목사님에 대해서 저에게 얘기를 했는데,

“저도 당신과 똑같이 느꼈었어요. 저도 기독교인이었는데 기독교에는 답이 없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불교인이 되려고 했는데, 어떤 한 남자를 만났어요.
그 분은 제가 전에 만났던 그 어떤 사람보다 성경을 잘 가르치세요.”

라고 하는거에요.

갑자기 제 안에서 희망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고, 이 성경공부를 정말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성경공부를 들었을 때, 제 인생에서도 새로운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전에는 제 병세가 저를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었고, 어떻게 하면 나아질 수 있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정명석 목사님이 개인책임분담에 대한 개념을 설명해주셨어요. 사람이 살다가 사고가 생기는 것은 자기 자신때문일 수도 있다고 아무도 저에게 얘기해준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나 정명석 목사님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책임분담이 있고 사람은 자신의 책임분담이 있다’ 고 말씀해 주셨어요.

이 설교를 들었을 때 저는 엄청난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어요. 제가 아픈 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제 책임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어요.

제가 건강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건강해 지기 위해서는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성경공부를 듣고 나서 일년동안 건강한 식생활을 하고, 운동을 했어요. 그랬더니 어지러움증이 사라졌고, 걷고 운동할 수 있을 만큼 체력도 생기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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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을 담다] 최태명 장로 – 최고의 선물

 


 

부모라든지 사랑하는 사람, 가족 간의 사랑도 많이 느꼈지만 저는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도 일찍 돌아가셔서 사랑의 대화가 부족했어요. 그런데 정명석 목사님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시간과 모든 말의 표현을 다해서 굉장히 잘해주시더라고요. 뭐냐면 거기 온 사람들에게 전부 그림을 그려서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저는 지금까지 다섯 아이들을 기르고 있지만 저도 부모님한테 편지 한통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제 다섯 아이들한테 생일선물로 케이크는 사줬는데 편지는 한 통도 못 써봤어요. 그런데 정명석 목사님은 자기한테 온 사람들에게 다 일일이 한 명도 빠짐없이 그림을 그려주시더라고요. 그림에다가 그 사람 이름, 부인 이름, 애들 이름가지도 써서 선물을 해주시더라고요.

근데 그 당시에 어느 정도로 바빴냐면요. 해외 인터넷으로 말씀을 전하는 상황이다 보니까 하루에도 한 두건 있는게 아니라 5,6건 있는 거예요. 말씀을 전하시고 또 내려오셨다가 또 쉬었다가 다시 또 말씀을 전하시고 내려오셨다가… 이걸 계속 반복하니까 굉장히 피곤해 하셨어요.

그리고 그림을 그릴 시간이 따로 없었어요. 문 앞에다 그림을 그리는 도화지랑 물감이랑 다 항상 준비해 놓는 거예요. 문을 들어갈 때 한 장, 그리고 나올 때 한 장, 따로 시간을 낼 수 없으니까… 그러다 보니까 굉장히 피곤해하셨어요.

한번은 주일예배를 전하러 오시는데 두 시간을 늦게 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두 시간 뒤에 오셨어요. 거기서 말씀 전하는 장소까지가 30m밖에 안됐거든요. 30m를 오는데 두 시간이 걸렸다는 거예요. 현기증이 나기 시작하는데 너무 과로하신거예요. 발걸음을 옮겨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피곤이 누적됐죠. 그런데도 사람들에게 갈 때 꼭 그림을 그려서 주시더라고요.

저는 그림을 받고 너무 감사했어요. 그냥 편지를 써주시는 것도 아니고 다른 선물을 사서 줄 수도 있잖아요. 근데 정명석 목사님이 잘 그리시는 색칠해서 그림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너무 감사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그걸 제가 가보로 가지고 있는데 사람을 대하는 정성과 사랑이 지극하시구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삼수를 해서 해양대학교를 들어갔는데 다른 학교를 2년 다니다가 다시 한국해양대학교를 들어가기 위해서 2학년 1학기 때 (다니던 대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시험을 봐야 되는데 시험까지 네 달 정도의 시간이 있었어요. 2년이 지나서 책도 많이 바뀌었더라고요. 시간이 너무 없는 거예요. 마음이 얼마나 조급하겠어요. 그걸 못하면 군대를 가야해요. 영장도 나왔어요. 춘천 102보충대 하고 딱 나왔더라고요. 그러니까 놀 시간이 없죠.

한 달을 꼬박 독방에 갇혀서 밖에 안나오고 공부를 해봤어요.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변하냐면 한 달 동안 있다 보니까 벽이 나한테 오는 거 같아요. 벽을 깨부수고 싶더라고요. 갑자기 정신이 이상해지는 거예요.

그 당시에 강원도 태백이라는 곳에서 공부를 했는데 태백에는 도서관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어디를 갔냐면 다방에서 공부를 했어요. 다방에서 무려 한 달을 공부했어요. 나중에는 사장님이 제가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제 자리에 불도 밝혀주시더라고요. 그래서 갇혀있는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제가 그 한 달 동안 조금이나마 느껴봤거든요.

그런데 정명석 목사님께서는 계속 독방에서 옥살이를 하시면서 하루에도 수백 통의 편지를 써주신단 말이에요. 말씀도 써주시고 하루에 볼펜을 두 자루 쓰신다는데 아마 써본 사람만 알 거예요. 그게 얼마나 많은 양인지를… 제자들을 향한 사랑을 가히 측량할 수 없구나… 헤아릴 수가 없어요. 어느 정도의 사랑인지를.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몸과 마음을 다하시는구나. 정성을 다하시는구나. 감사의 마음을 늘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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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을 담다] 최태명 장로 – 효

선생님과 좀 가까이 있을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선생님께서 “아버님 뭐하셔?” 이렇게 물으시는 거예요.

“네 아버님 바다에서 김 농사 짓고 있습니다.”
“그럼 전화는 자주 해?”

이러시더라고요.
제가 특히 전화를 좀 자주 안 하거든요. 전화를 잘 안 하는 불효자식인데

‘어떻게 아셨지?’
“전화 자주 안 합니다.”

말씀드렸는데
선생님께서 부모님한테 자주 전화하고 자주 부모님께 보고 싶다고 그러고 부모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하고 그렇게 자주 전화하라고 말씀해주셨어요.

또 말씀을 들었으니까 실천을 했어요. 평소에 전화 안 하던 제가 집에 아버님께 전화도 자주 드리고

“아버지 이제 제가 나와서 조금이라도 경제생활을 해보니까 참 어렵고 힘듭니다. 아버지 정말 저를 키워주시느라고 정말 많은 고생 하셨다고 너무 감사하다고.”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아버님이 굉장히 흡족해하셨어요.

“네가 어떻게 그런 것을 알아?”

이러시더라고요

어떨 때는 저기 한번 옥천 시장에 한번 들르셨어요. 옥천 시장에 들르셨는데 그날이 장날이었나 봐요. 사람들도 많고 한데 장을 보시면서 붕어빵을 사셨어요. 붕어빵을 사시고 호떡도 사시고 그러시면서 이거 어머니께 갖다 드리신다고 붕어빵을 사시더라고요.

‘어떻게 붕어빵을 저렇게 사다 드릴 수 있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선생님의 그 순수한 모습이 너무너무 감동이 되었어요.

‘어떻게 비싼 거 이런 거 안 사가시고 붕어빵을 사 가실까?’

굉장히 좀 의아스러웠는데
그런데 월명동 오셔서 선생님께서 어머님께 붕어빵을 드렸는데 어머님은 또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뭐 비싼 거 안 사고 오셔도 그래도 자식이 뭐라도 가지고 오는 거 있잖아요. 그런 거를 부모님은 좋아하시는 거더라고요.

항상 뭐 큰 거는 아니구나.

저렇게 부모님께 효도하는 모습이 우리도 평소에 조그맣게라도 조그만 사탕 하나라도 어머니께 아버지께 드리면서 저희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아버지 어머니 저희들 지금까지 키우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냐고 이런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야 되겠다

라는 것을 그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어떤 그런 삶이 저희들 한테 같이 스며들어오고 배우게 되니까 저희들도 그때 그러한 아버지한테 효도의 말을 전하지 못했더라면 아마 지금도 후회스러웠을 겁니다. 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하는 거잖아요.

내가 부모님 마음 못 알아드리고 부모님께서 그때 고생하셨던 거, 자식 키우면서 고생하셨던 것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하지 못하고 후회하면서 살았을 텐데 그래도 그때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셨던 부모님께 아버님께 전화 자주 드리라고 하셨던 그 말을 실천하고 나니까 지금은 참 생각해보면 후회스럽지가 않아요.

“야 내가 그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너무 그때 나는 20대였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그런 철이 없던 시기였어요. 그런데 선생님의 그 말씀이 없었더라면 저는 아마 그런 말을 못 드렸을 거예요. 그래서 지금 항상 생각해보면 그게 지금도 자랑스럽고 속이 후련하고 선생님께 항상 감사한 마음 간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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